안녕하세요.
오늘은 영화 봉오동 전투의 줄거리와 이후 전투인 청산리 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줄거리
1944년 잔혹한 일본 식민 지배 아래에서 조선인들은 엄청난 고통과 억압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조국의 상황을 바꾸기 위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외딴 산에서 유격대원이 된 숙련된 사격선수이자 전직 군인인 이장하(유해진 분)의 이야기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게릴라 공격을 수행하고, 그들의 작전을 방해하는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게 됩니다. 통합과 협력의 힘을 믿는 젊고 이상주의적인 독립운동가 김장옥(류준열 분)은 이장하의 무리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들의 결의에 영감을 받습니다. 김장옥은 이장하에게 다가가 국경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군인들과 힘을 합칠 대담한 계획을 제안합니다. 탕 대위(박지환 분)가 이끄는 군인 또한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고 그들만의 게릴라전을 벌여왔습니다. 이 계획에 대해 이장하는 처음에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김장옥의 계획에 동의합니다. 이들은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가 있지만 각자의 조국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협력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면서 국적을 초월한 동지애로 무장합니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일본의 보급로와 주요 기반 시설을 파괴하고 포로로 잡힌 대원들을 구출하는 활동을 펼치며 일본에 저항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억압받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지만 이러한 저항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 또한 시작됩니다. 한국과 중국의 연합군은 견고하게 요새화된 일본 기지를 과감하게 공격했고 전투는 양측에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특히 일본이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전투원들이 새로운 결의를 얻게 되는 해방 투쟁의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일본의 점점 더 가혹한 공격에도 조선과 중국인들의 투지와 단결로 맞서고 결국 의미 있는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청산리 전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기세가 올라가면서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 또한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이에 일제의 대만주 독립운동 탄압도 점차 강경해졌습니다. 특히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해 참패를 겪은 일제는 마침내 '간도 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세워 간도 지역에 대해 초토화하는 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한편 러시아 내전에 가담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차 세계대전이 종전하고 조국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1920년 2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해 쓸모가 없어진 무기를 처분하고자 했고, 마침 독립군은 무력으로 독립을 준비하는 입장이라 이 무기를 건네 받게 됩니다. 독립군이 무장하는 동안 일본군은 '간도 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에 따라서 19사단 병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28여단, 그리고 관동군 부대를 동원하고, 군 물품을 보강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19사단 히가시 마사히코 소장 하에 병력을 동원하여 청산리의 독립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려고 계획합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 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 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해 전투준비를 했습니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사람과 말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습니다. 오전 9시경 일본의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 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이게 되고, 뒤이어 일본의 본대가 도착하여 독립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입니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완루구에서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의 제 1.2 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또 교전을 벌입니다. 25일 밤까지 여러 차례의 교전을 일본과 벌이면서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이동휘의 제안에 따라 소련으로 올라갔다 자유시 참변 문제가 불거지는 등 악재 속에서 독립군은 고군분투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독립군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한 것과는 별개로 독립군을 보호하지 못한 임시정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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